물질적인 속도에 지친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멈춤일지도 모릅니다. 더현대 서울 ALT.1에서 열리고 있는 회고전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잠시, 그리고 영원히>는 작가의 붓이 빛과 바람, 커튼, 창문, 물가 같은 일상적인 소재들을 재탄생시킨 기록입니다. 이 평범한 풍경들은 어느 순간 우리를 고요한 내면으로 안내합니다.
이번 회고전은 그의 70년 예술 인생을 총망라한 국내 최대 규모의 자리입니다. 전시는 총 14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되며, 4개의 섹션에서 연대기 순으로 전개됩니다. 1960년대 초기 작품에서는 강렬한 명암과 구조적인 구성이 돋보입니다. 중기에는 빛과 색채가 주된 요소로 자리 잡으며 ‘빛의 회화’라는 독특한 화풍이 확립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죠. 후기 작품에서는 창문을 통해 확장되는 시선과 깊어진 내면의 고요가 드러나고, 최근작에서는 물과 커튼, 빛이 어우러진 몽환적 장면으로 명상적 세계관이 완성됩니다.
전시는 회고전의 성격을 띠지만 작가의 화려한 이력을 조명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고, 회화가 일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전시 공간 한 편에서는 브라운의 작업실을 재현해 작가의 영감이 어떻게 작품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고민과 창작 과정을 들여다보게 만들죠.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순간들이 깊은 울림을 지닐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울림이 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ALICE DALTON BROWN 빛과 바람, 자연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예술가. 1970년대 이래 뉴욕에서 50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그는 창가와 커튼을 중심으로 일상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을 얻으며, 전 세계 예술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는 예술가로 거듭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Small Golden Corner>(1988)은 세계적인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기도 했다. |
Interview
: 빛을 따라 걸어온 시간
“매일 아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보며 ‘오늘 이걸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그걸 그렸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전시를 위해서도 아니었죠. 그냥 제게 필요한 순간이었어요.”
─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더 시적으로 표현되는 듯합니다. 화풍이 변화해 온 여정에 대해 들려주세요.
항상 명확한 경계와 부드러운 대비, 인공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뒀어요. 젊은 시절에는 눈앞에 보이는 사물의 형태나 구조에 집중했고 점차 그 안의 분위기, 감정, 그리고 찰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죠. 빛과 여백은 그 모든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됐고요. 시간이 흐르며 표현은 더 절제했지만, 내면의 울림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작업 방식이나 소재가 변했다기보다 제 삶과 함께 천천히 흘러온 결과가 작품에 반영된 셈이죠.
─ 초기작에도 빛과 공간을 다룬 장면이 보이더군요.
처음에는 아주 본능적으로 ‘어떤 장면에 마음이 끌리는지’를 따라 그렸습니다. 오래된 농가, 계단에 비친 나무 그림자, 부엌 창가의 풍경처럼요. 제가 끌렸던 건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서였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때의 작업이 현재 화풍을 정립하게 된 토대였어요. 나중에서야 그 선택이 ‘빛’과’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죠.
─ 어느 시점부터 여백과 경계를 주제로 한 작업이 자주 등장합니다. 작업에서 전환점이 있었다면 어떤 순간이었을까요?
1994년 여름, 친구 집 창문에서 일렁이던 커튼을 본 순간이 기억나요. 그 커튼이 빛에 따라 움직이던 장면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았어요. 이를 계기로 창밖의 풍경뿐만 아니라 그 풍경과 나 사이에 놓인 공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창, 커튼, 물 위의 반사광 등 모든 찰나의 장면을 단순한 배경을 넘어 작품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작품을 감싼 다양한 감각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기도 했습니다. 빛과 여백은 물론 순간의 공기까지 오롯이 전달하고 싶었거든요.
─ 특히 최근작 <Ethereal>(2025)에서 다층적인 구성이 느껴집니다.
<Ethereal>은 무척 개인적인 작품이에요. 창을 가로지르는 얇은 커튼, 호수 위의 빛, 그 사이를 흐르는 공기의 떨림까지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여름 별장에서의 기억이 배어 있어요. 또 저는 커튼을 ‘장막’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장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그 너머의 신비로움을 상상하며 두 가지 시점이 공존하도록 묘사하는 것이죠.
─ 오랜 시간 동안 회화를 계속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매일 아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보며 ‘오늘 이걸 그리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면, 그걸 그렸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전시를 위해서도 아니었죠. 그냥 제게 필요한 순간이었어요. 그렇게 매일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덧 50년이 지나 있었고 그 세월이 제 그림에 켜켜이 쌓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진심이 관객에게도 닿았던 것 같아요. 저의 하루가, 누군가의 위로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보이는 것 너머의 감각
“저는 ‘사이 공간’에 매력을 느껴요.
내부와 외부, 현실과 기억, 현재와 과거를 잇는 그 지점에서 가장 많은 감정이 발생하거든요.”
─ 작품 속 자연광과 구조물의 조화가 매우 정교합니다. 어떻게 이런 균형을 완성하시나요?
제게 화면은 일종의 정서적 구조물이에요. 단지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죠. 수직과 수평의 균형, 공간의 깊이감, 빛의 흐름은 모두 감정과 연결돼 있어요. 가령 커튼의 주름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창틀이 화면을 어떻게 나누는지가 그림 전체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죠. 저는 작업할 때 끊임없이 화면을 보며 그 균형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 커튼, 창문, 수면 위 반사광은 작가님만의 시그너처처럼 보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창이나 커튼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창구’예요. 그것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반대로 안쪽의 정서를 비추기도 하죠. 물 위의 반사광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안엔 끊임없는 움직임이 있어요. 그런 섬세한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저는 붓자국을 거의 남기지 않고, 얇은 레이어를 반복적으로 쌓아가며 화면을 완성합니다. 마치 숨결처럼요. 감정은 조용히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 작품에서 창문이나 발코니 등을 기점으로 한 ‘경계 공간’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사이 공간’에 매력을 느껴요. 내부와 외부, 현실과 기억, 현재와 과거를 잇는 그 지점에서 가장 많은 감정이 발생하거든요.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은 사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제 그림에는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관객이 스스로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도록 여백을 남깁니다. 그 여백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완성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감정의 공명, 마음에 스며드는 그림
“그림은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아요.
누군가의 시선과 감정이 닿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작가님의 조용한 풍경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늘, 조용하고 사적인 공간을 그리며 스스로를 위로해 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관객들이 그런 공간에서 자신만의 감정을 발견하더라고요. 누군가는 그림 속 풍경을 보며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고, 또 누군가는 지금의 외로움을 보듬어줬다고 말했어요. 제가 만든 ‘하루의 한 장면’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쉼표가 된다는 건, 작가로서 정말 감사한 경험입니다.
─ 2021년 전시에서 한국 관객들이 ‘멈춰진 시간’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전달하고 싶은 시간의 결은 무엇인가요?
이번 회고전은 말하자면 저의 기억 여행이에요. 젊은 엄마였던 시절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그리던 순간부터, 나이 들어 호숫가 별장에서 햇살을 바라보며 그렸던 날까지… 저의 삶을 함께 걸어가는 여정 같은 전시입니다. 저는 관객분들이 그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순간’을 발견하셨으면 해요. 어떤 그림 앞에서 멈춰 서게 될지 모르지만, 그 시간이 누구에게나 조용하고 특별하게 남기를 바랍니다.
─ 백화점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갤러리와는 또 다른 감상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백화점에서 전시를 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처음엔 낯설었어요. 그런데 한국의 백화점은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쉬고 머무는 ‘일상의 장소’더라고요. 오히려 그런 공간에서 우연히 그림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 가족, 연인, 또는 혼자 전시를 찾은 관객들에게 작품이 어떻게 기억되었으면 하나요?
제 그림이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을 비치는 ‘거울’이 되길 바랍니다. 가족과 함께 보면 지나간 따뜻한 기억이 떠오르고, 연인과 함께 보면 함께하는 감정이 더 깊어지며, 혼자라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림은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아요. 누군가의 시선과 감정이 닿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객이 그림 속에 스며들어 각자의 감정 속에 머무르는 것, 그것이 제가 가장 바라는 일입니다.
✔️CHECK POINT
1. 전 생애를 아우르는 최대 규모 회고전
이번 전시는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50여 년 예술 여정을 한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In the Kitchen>(1965)과 <Tree Shadow with Stairs>(1977) 같은 초기작은 일상 속 빛과 구조를 정적으로 담아내며, 작가가 처음부터 ‘빛’과 ‘경계’라는 주제를 섬세하게 탐구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은 공간과 구도의 질서를 통해 감정을 절제되게 드러내는 특징이 돋보입니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빛을 활용하는 방식이 정제되어 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습니다.
2. 빛과 구조가 만든 정서의 풍경
작가는 창문과 커튼을 단순한 장면이 아닌 감정의 통로로 삼았습니다. 관객이 화면 속 경계 너머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Westfield Porch Columns>(1979)에서는 베란다 기둥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구조와 정서를 함께 드러냅니다. 또 <View with Window Edge, AAR #12>(2016)에서는 창틀과 커튼, 바깥 풍경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감정의 흐름을 이끕니다. 이는 삶과 감정이 만나는 ‘사이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한 방식인 셈입니다.
3. 관객의 시선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장면
<Ethereal>(2025)은 커튼과 수면, 빛이 어우러진 고요한 장면 속에 작가의 감정을 응축시킨 작품입니다. 얇은 레이어로 완성된 화면은 숨결처럼 은은하게 다가오며, 관객이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사할 수 있는 여백을 남깁니다. 그림 속 공간은 조용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이 작품은 관객의 시선을 거치며 비로소 완성됩니다.
도심의 소란 속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당신에게 이번 전시를 권합니다. 전시는 오는 9월 20일까지.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잠시 그리고 영원히>
📍장소: 더현대 서울 6층, ALT.1
🗓️기간: 2025.6.13 ~ 2025.9.20
주최: MBN, MBN미디어렙
주관: (주)씨씨오씨
협력: 띠오갤러리, 널위한문화예술, NIC
후원: 주한미국대사관, 더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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