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2주 차, 하루가 참 길게 느껴지던 날이었습니다. “엄마, 뭐 하고 놀까?”라는 말이 벌써 다섯 번째쯤 들려왔을 무렵, 문득 이 전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8살 아들과 함께 찾은 곳이 현대어린이책미술관(MOKA), <봉주르 팝업 2025> 전시였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예쁜 팝업북 전시겠지’ 했던 마음이, 전시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종이로 만든 놀라운 세계로 미끄러지듯 들어갔고,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작은 우주들이 톡톡 튀어나오는 걸 함께 지켜봤습니다.
"팝업북이 이렇게 예술적일 수 있나요?"
전시의 주인공은 프랑스의 북 아티스트 듀오, 아누크 부아로베르Anouck Boisrobert와 루이 리고Louis Rigaud입니다. 두 작가는 학창 시절부터 함께 작업을 시작했고, 지금은 프랑스 서부 항구도시 라 로셸에서 일러스트레이션, 팝업, 애니메이션, 디지털 프로그래밍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아누크는 책의 그래픽과 그림을, 루이는 팝업북의 구조적 설계와 인터랙티브 기술을 담당하며 ‘이야기와 구조’를 한 권의 책에 예술적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해왔죠.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면서도, 성인 관람객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입니다.
이번 전시는 현대어린이책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며, 2017년 인기 전시였던 <봉주르 팝업>의 새로운 버전으로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전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열렸지만, 이번에는 초등학생이라고 띄엄띄엄 글을 읽고 질문도 쏟아내는 아들과 함께여서 더 깊고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전시는 두 가지 섹션으로 구성됩니다.
1) 아트 팝업: 이야기를 품은 종이의 마법
첫 번째 전시실은 그야말로 ‘종이 세계의 무대’입니다.
책장을 펼치면 곡예사가 공중제비를 돌고, 나무늘보가 사는 숲이 솟아나며, 도심의 빌딩이 오밀조밀 올라갑니다. 모든 게 종이로 만들어졌다고 믿기 힘들만큼 역동적이고, 어떤 장면은 조용히, 어떤 장면은 장난기 가득 다가옵니다.
대표 작품 소개:
팝빌 Popville
빨간 지붕이 있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도심으로 확장되는 풍경을 팝업북 구조로 담았습니다. 아들과 함께 마을이 커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여기가 네가 좋아하는 도서관이야!” 하며 상상 놀이를 했습니다.
곡예사 가족 Famille Acrobat
커다란 공연 텐트 안에서 벌어지는 가족 공연 이야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곡예사의 표정이 달라져서 보는 재미가 있고, 색상이 알록달록 선명해서 아이가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책을 보는 사람이 관객이 아닌 무대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게 특징입니다.
나무늘보가 사는 숲에서 Dans la forêt du paresseux
환경 파괴와 생태계 문제를 담은 작품으로, 무성한 숲이 점차 사라지는 과정을 종이로 ‘펼쳐’ 보여줍니다. “숲이 점점 없어지는 건 왜 그래?”라는 아이의 질문 앞에서, 저도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바다 이야기 Océano
깊고 푸른 바다를 표현한 책. 파도, 물고기, 쓰레기 경고 표지까지, 종이가 품은 환경 메시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2017년 전시에서는 빙하 장면을 큰 구조물로 연출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아름다운 라군 장면을 유리벽을 이용해 연출했습니다.
앗! 내 모자 Oh! Mon chapeau
잃어버린 모자를 따라 도시의 곳곳을 여행하는 이야기. 화려한 팝업 요소와 유쾌한 스토리에 아이가 푹 빠졌습니다.
이 외에도 계절의 변화를 담은 <팝 컬러링 Pop-coloriages>, 두 민족의 이야기를 담은 <베르소 Verso>, 전쟁과 자유의 역사를 담은 <자유 Liberté> 등 작은 책 안에 담긴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2) 아트 게임: 책을 넘어서, 손으로 노는 예술
두 번째 전시실은 더 흥미진진합니다. 책을 ‘읽는’ 전시가 아니라, 직접 ‘만지고’, ‘움직이는’ 체험이 가득한 공간입니다.
디지털/인터랙티브 콘텐츠 소개:
앗! - 매직 드로잉 프로그램 Oh! - The Magic Drawing App
화면을 터치하면 도형이 춤추듯 움직이고, 빈 여백이 그림으로 채워지는 인터랙티브 드로잉 프로그램입니다. 아이는 이 프로그램에 푹 빠져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팁 탭, 나의 인터랙티브 그림책 Tip Tap, mon Imagier Interactif
키보드로 단어를 입력하면 해당 이미지가 화면 위에 등장합니다. 단어와 그림을 연결하며 놀이하듯 언어를 배울 수 있어, 아이가 전시 후 집에서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리스와 거인 Iris and the Giant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주인공 ‘아이리스’가 거인과 싸우며 내면을 성장시키는 RPG게임입니다. 몽환적인 분위기와 그래픽 덕분에 아이보다 제가 더 오래 붙잡고 있었습니다.
패닉 인 스튜디오! Panique au studio!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게임으로, 도구를 고르고 캐릭터를 움직이며 직접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습니다.
라바루프 LavaLoop
손으로 그린 레트로풍의 만화 이미지와 강렬한 음악과 리듬이 어우러지는 에너지 넘치는 뮤직 게임입니다.
라미나 LAMINA
MOKA의 친환경 프로젝트로, 생태계 파괴 문제를 유쾌한 게임 방식으로 풀어낸 체험 콘텐츠입니다. 전시 마지막 즈음에 위치해 있어, 아이가 “이건 또 뭐야!” 하며 다시 에너지를 충전하더군요.
전시가 끝난 뒤, 아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엄마, 책 속에서 뛰어다닌 기분이었어.” 전시관 한쪽에 마련된 드로잉 체험 공간에서 아이는 전시에서 본 장면을 기억해내며 조심스레 색연필을 들었습니다. “나도 곡예사를 그릴래.” 그렇게 그려진 종이는 다른 아이들의 그림들과 함께 벽에 붙여졌고, 작은 전시가 하나 더 열린 셈이었죠.
어른의 시선으로 본다면 ‘종이와 게임을 결합한 예술 전시’지만, 아이에게는 진짜 여행이고, 모험이고, 놀이가 되는 전시였습니다. 현대어린이책미술관(MOKA)은 늘 상상력의 문을 열어주는 공간이지만, <봉주르 팝업>은 그 문을 종이로 만들고, 상상으로 펼쳐주는 전시입니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경험, 지금 놓치기 아까운 시간입니다.
<봉주르 팝업 2025> 전시 정보
- 전시기간 : 2025.07.23(수) ~ 10.26(일)
- 장소 : 현대어린이책미술관 MOKA(현대백화점 판교점 5, 6층)
- 작가 : 아누크 부아로베르 & 루이 리고
- 관람 대상 :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전시
- 전시문의 : MOKA 홈페이지 또는 현대백화점 고객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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