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K is the New Black (2)
한국 현대미술을 오랜 시간 관찰해온 평론가, 서울 태생, 경계성 아스퍼거 증후군, 커밍아웃한 바이섹슈얼인 임근준(이정우)이 경계 밖의 시선으로 대구 경북 미술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합니다. 대구 경북의 미술을 향한 특별한 애정을 전제로, 객관적인 동시에 편파적으로.
전후 추상미술에서 ‘대구로부터의 실험 미술’까지
1957년은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원년으로 꼽힌다. 특히 대구는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성을 드러내왔으며, 이는 추상미술 등 아방가르드적 흐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6년 당시 한국 현대미술계는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보이콧 사건으로 사분오열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운영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를 답습하다시피 하던 국전의 한계상, 심사 기준으로 보나 심사 권력으로 보나 여러 논란과 파행의 여지를 품고 있었다.
식민기에 통치자들 옆에서 부역하며 호의호식하던 이들이 해방 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세상을 호령했으니, 이승만 정권기의 고학苦學 청년들은 그들을 ‘해방 귀족’이라 불렀다. 멸칭이었다. 그러한 기성세력을 향한 분노가 요동치던 1956년에 흥미로운 전시가 열렸다.
1956년 5월 16일, 명동의 동방문화회관에서 ‘4인전: 김충선, 김영환, 박서보, 문우식’이 개막할 때 작가들은 ‘국전의 반시대적 권위주의와 낡은 가치관’에 도전하는 ‘반국전선언反國展宣言’을 내걸었다. 열흘 전, 청년 이어령이 <한국일보> 5월 6일 자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이미 세상을 뒤흔든 터였다. 권위주의에 매몰된 기성 문단을 싸잡아 비판했지만, 그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모더니즘에 대한 열풍이 일던 1957년, 전후 한국 추상미술 운동을 이끈 다섯 그룹이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연이어 등장한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창작미술가협회, 신조형파, 백양회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체는 현대미술가협회, 즉 ‘60미협’이었다. 이러한 정풍整風의 흐름은 조선일보사의 연례전 <현대작가초대전>을 통해 성장을 거듭했고, 1960년의 4·19혁명과 1961년의 5·16 군사정변을 거치며 ‘산업화 시대의 민족색을 추구하는 추상미술’은 신주류의 위치에 오른다.
1974년 4월 개막한 <대구현대미술제>를
기폭제 삼아
전국 곳곳에 대형 현대미술 기획전이 들어섰다.
흥미로운 점은 박서보 세대의 문제의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후배 세대들이 1965년 한일 외교 정상화 이후 실험 미술, 오브제 미술, 행위 미술 등 새로운 시도를 거침없이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1967년의 <청년작가연립전> 이후 본격화한 이 흐름 속에서 경북 상주 태생의 김구림(1936~)이나 대구 출신의 이강소(1943~)는 단연 독보적 존재였다. 한국 최초의 해프닝으로 간주되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의 대본은 부산 태생의 모더니스트 평론가 오광수(1938~)가 썼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역사적 흐름은 대구를 중심축 삼아 전개된 현대미술 운동이다. 1974년 4월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가 대구 계명대학교 미술관에서 개막했는데, 이는 지역주의 실험 미술 운동의 시발점으로 작용했다. 이를 기폭제 삼아 전국 곳곳에 대형 현대미술 기획전이 개최되기 시작했고, 1981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자연 미술 운동 조직 ‘야투野投’가 결성되기에 이르니, 대구는 1970년대 한국식 지역주의 미술 운동의 메카였던 셈이다.
한국의 동시대 실험 미술 촉발한 <대구현대미술제>
1979년까지 모두 다섯 번 개최된 <대구현대미술제>는 경북 안동 태생의 미술운동가 황현욱(1948~2001)이 실무를 맡았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구현대미술제>의 자료 발굴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조사와 연구 기반의 재조직화 미술관 전시가 시급한 상황이다.
그러나 확실한 점 한 가지는 <대구현대미술제>가 모더니즘의 좁은 리그를 확장해 동시대 미술로 나아가는 결정적 관문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1977년 3회 때 전국 각지에서 196명의 작가가 모여들며 규모가 급격히 커졌고, 강정 낙동강 변에서 행위예술을 전개한 일군의 작가는 지역 특유의 시공에 순응하는 한국식 자연 미술을 처음으로 본격화했다. 옷을 벗어 던진 이강소는 모래 무덤 위에 올라앉아 소주를 마시는 퍼포먼스를 펼쳤고 박현기(1942~2000)는 횟가루로 포플러나무의 그림자를 만들며 실존에 실존으로 답하는 수행적 작업을 시도했다.
*비고: 참여 작가였던 김진혁 선생님의 지적에 따라 사실 관계를 명확히 고쳐 적습니다: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를 김기동, 이강소가 주도했고 2회 이후론 거의 이강소가 주도했다. 모든 경비를 이강소가 마련했던 것. 1977-79년도의 기획을 이강소가 주도하는 가운데, 박현기가 그를 돕고, 황현욱이 실무 총괄격의 역할을 맡아 전시 연출 등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강소 작가는 ‘박현기, 이묘춘, 최병소, 황현욱 등이 애썼고, 특히 이묘춘의 의리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전한다.
대구 태생인 박현기는 자연의 실존에 대응하는 하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인간 행위를 통해 새로운 세계상의 획득과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 예술가다. 1981년 3월 22일 오후 3시, 작가는 거울을 부착한 대형 인조 바위를 16m 길이의 트레일러에 싣고 40여 분에 걸쳐 대구 도심을 퍼레이드하듯 통과하면서 시민의 반응까지 영상과 사진으로 촬영했다. 대구MBC에서 출발해 중구청 앞을 지나 공평동 72번지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개인전 <박현기>를 주최하는 맥향화랑에 도착해서는, 화끈하게 벽을 부수고 3m가 넘는 크기의 인공 바위를 갤러리 공간 안으로 이동시켰다. 대구의 도시 공간이 예술의 매체가 되는 기념비적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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