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풍경의 궤적
오랜만에 청주로 향하는 길.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2018년 개관 때 이후 두 번째 방문이다. 10여 년간 방치된 담배 제조장을 개조해 탄생한 이곳은 수장고형 전시장을 갖추고 있어 관람하는 동선이 매우 흥미롭다. 미술관에서 소장품 기획전 〈수채: 물을 그리다〉가 열린다는 소식에 청주행을 서둘렀다. 97점의 수채화는 어쩌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한 축의 에센스가 아닐까도 싶었다. 물감과 물이라는 매재媒材가 미묘한 스밈과 번짐을 만들어내는 수채화. 이는 둔탁하고 번질거리는 유채의 느낌과 달리 시원하고 담백한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여름이라는 계절과 더 잘 어울린다. 5층의 전시장에는 제법 많은 관람객이 각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마주하고 있었다. 수채 물감의 농담을 힘차고 간결하게 표현한 이중섭의 그림들, 초현실주의적 느낌을 풍기는 김종하의 리드미컬한 색채와 선, 수채의 투명함으로 여릿한 파스텔 톤의 겹쳐진 꽃잎을 표현한 곽인식의 붓질. 수채화라는 이름 아래 색과 서사, 실험적 추상이 다채롭게 변주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이끈 이인성의 ‘카이유’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십수 년 전 호암미술관에서, 그리고 몇 해 전 과천에서 본 그림을 또 다른 장소에서 만나는 건 작품과 연속적인 맥락을 만들어가는 진솔한 경험이다. 전에 보지 못한 것이 보이고, 새롭게 떠오르는 감정이 그림과 나 사이의 공백을 채운다. 이인성이 도쿄로 건너간 이듬해인 1932년에 그린 이 정물화는 당시 그가 근무하던 오오야마 상회의 주소가 그림 뒤에 명기되어 있다고 한다. 카이유는 카라꽃을 뜻하는데, 화면에는 카라뿐 아니라 장미와 루드베키아가 함께 꽂혀 있다. 상승하는 하얀 카라꽃과 대비되는, 고개를 떨군 보랏빛 장미와 붉은 루드베키아. 역동적이고 촘촘한 터치와 흑색 배경의 수평적이고 단속적인 붓 터치가 수직의 화병과 어우러지며 안정감을 자아낸다. 경찰이 오발한 총에 맞아 서른여덟에 요절한 그의 비극을 떠올릴 때, ‘카이유’는 일본 유학 초기의 촉촉한 다짐과 설렘이 담겨 있는 한 시절의 화사한 표현으로 다가온다. 수채화의 본령인, 천천히 스며들고 살포시 겹쳐지며 생겨난 풍부한 혼합은 수채화를 더욱 현재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1930년부터 1990년까지 완성한 수채화 수십 점이 오늘의 여름을 영롱하게 살고 있었다.
곧장 충북 진천으로 1시간 남짓 달려 내촌리의 넓은 부지에 자리한 뤁스퀘어root square에 도착했다. 뤁스퀘어는 새로운 농업 기반의 문화 콘텐츠를 제안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스마트 팜, 카페와 레스토랑, 3동의 스테이를 갖추고 있다. 이상적인 미래 농업 환경을 경험한다면 희미한 나의 도시 탈출 계획이 조금이나마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로 뤁스퀘어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뤁스퀘어의 얼굴인 A동 웰컴센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1층으로 내려가 자연의 내음으로 가득한 실내 정원 스템 가든을 지나 푸르름이 펼쳐진 밖으로 나갔다. 주변 논밭과 어우러진 평지 위에 ‘교감하는 집’, ‘작은 집’, ‘이로운 집’ 3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내가 묵을 곳은 일본 디자이너 하라 겐야原研哉, Kenya Hara가 디자인한 교감하는 집. 2022년에 열린 〈HOUSE VISION〉 전시를 위해 지은 이 집은 삼각형 박공지붕을 얹은 단순한 사각 구조로, 단단한 목재 패널로 건축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이나 벽의 분리 없이 침실과 거실, 주방, 욕실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 무인양품의 무지하우스 프로젝트가 선보인 나무 가구들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침대를 테이블과 벤치로 활용할 수 있으며, 소파 뒤에 작은 테이블이 딸린 신박한 사방 가구의 형태를 띠고 있다. 최소한을 추구하는 하라 겐야의 철학이 생활의 형태로 고스란히 담긴 평평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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